시연은 결혼식 당일 아침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했다. 전 애인의 결혼식. 5년을 만났었고, 1년 전에 헤어진 사이였다. 이젠 다 잊었고, 스스로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무려 몇 주 전엔 직접 만나 청첩장도 받았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이걸로 다 잊자고 생각하고 결혼식에 참석할 작정이었는데 그게 또 막상 눈앞에 닥치니 갈등이 됐다. 시연은 화장대에 앉아 있다 말고 침대로 뛰어들 듯 누워 발을 동동 굴렀다. 침대 너머로 던져둔 핸드폰에서는 오늘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동창들과 만들었던 단톡이 쉴새 없이 울리고 있었다.
“아, 어떡해.”
지금이라도 급한 일이 생겨 못 간다고 할까 고민하다 습관처럼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덮듯이 감싸 쥐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또 몇 주 전에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다이어트를 한 건지, 신부 관리라도 받은 건지 안 그래도 이뻤던 게 더 이쁜 얼굴을 하고 나타나서는, 청첩장을 내밀었다. 이미 동창들에게서 소식은 건너건너 들었던 덕에 놀라지는 않았고, 만나서 점심이라도 먹자고 연락이 왔을 때부터 이럴 줄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느 친구들처럼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넬 깜냥은 못됐다. 시연은 겨우 덤덤한 척을 하며 애꿎은 물만 들이켰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결혼식에 꼭 와줬으면 좋겠어.’
시연의 머릿속에선 그 얼굴과, 그 얼굴로 말했던 그 마지막 말이 계속 반복 재생이라도 설정해둔 것 마냥 계속 맴돌았다. 시연은 결국 몸을 다시 일으켜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대 위에는 청첩장과, 축의금으로 넣으려고 전 날 뽑아 둔 현금이 놓여 있었다.
*
신부로 서 있는 그 애는 당연하게도 예뻤다. 신랑이라고 옆에 서 있는 남자는 훤칠한 키에 깨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상한 애랑 결혼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시연은 식장 맨 뒤에 삐딱하게 서서 예식을 지켜보다 같이 온 동창들에게는 급한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고 식이 끝나기 전에 빠져나왔다. 사실 기왕에 온 거, 신부 대기실에서 같이 사진도 찍고, 피로연에서 다시 마주치면 결혼 축하한다고, 그렇게 말해줄 참이었다. 나는 이제 정말 괜찮고, 너를 다 잊었다고, 나도 잘 지낸다고 있는 힘껏 보여줄 작정이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안 괜찮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시연은 일부러 몇 정거장 전에 내려서 천천히 걸었다. 안 괜찮다고 해서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게 괜찮은 것은 또 아니었다. 시연은 누구라도 불러서 술이라도 마실까 했지만 이런 날에 누구와 마주 앉아 술이라도 마셨다간 온갖 진상을 부릴 게 뻔해 조용히 술만 사서 집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앉아 술을 들이키던 시연은 뭐라도 틀어 두려고 거실에 놓인 TV를 켜고 아무렇게나 채널을 돌렸다. 수 십 개의 방송이 지나가는 도중에, 유명 휴양지에서 한식당을 차리고 장사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재방송이 나왔다. 한참을 리모컨을 놀리던 시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시연아, 우리도 나중에 저렇게 장사하고 살까? 할머니 되면.’
오래 전, 주말 오후에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다 말고 그 애가 그랬었다. 나중에, 은퇴하고 저런데 가서 식당 차리고 살자고. 시연은 저런 건 방송에서 다 짜준 대본이고, 짜고 치는 거라며 자영업이 얼마나 힘든 지 아냐고 대꾸했었다. 그때 시연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 이야기를 듣던 그 애는 그냥 알겠다고 해주면 덧나냐며 아프지 않게 시연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때 그 말에서 중요했던 건 그런 식당 따위가 아니라, 그 나이가 돼서도 같이 있자는 말이었을 것이다. 시연은 이제서야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
시연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깨질 듯한 두통으로 잠에서 깼다. 한참을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도 아직 숙취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켰다가 알림 센터에 떠있는 문자를 보고 순식간에 술이 깨버렸다.
[WEB 발신] PD국민은행
해외승인 박*연님
04/24 02:23
265.4 (US$) GARUDA AIR
문자 내용을 보고 나서야 지난 새벽의 일이 스치듯 떠올랐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옛날 생각이 났고,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각 시연은 한창 신혼 여행지로 날아가고 있을 그 애에게 연락하는 대신 항공권 비교 사이트를 뒤졌다. 그러다 타이밍 좋게 뜬 특가 항공권에 아무렇게나 결제를 해 버린 것이었다. 깜짝 특가!라고 붙어버린 탓에 항공권은 양도는 물론이거니와 취소도 불가능했고, 메신저로 날아온 이티켓은 당장 일주일 후가 출발이었다.
“아 미쳤나봐….”
시연은 졸지에 혼자 발리에 가게 됐다.
2.
기왕 이렇게 된 거, 시연은 제대로 즐기고 오자는 생각에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장 포털 사이트 메인 검색 창에 ‘여자 혼자 발리’, ‘발리 맛집’, ‘발리 여행 추천’ 따위의 키워드를 검색하고 결과로 뜨는 블로그를 하나하나 정독했다. 사원이니 뭐니 유적지 관광은 필요 없고, 낮에는 실컷 액티비티나 하다가 마사지 받고, 밤엔 술이나 마시고 골아 떨어질 작정이었다.
몇 십 개의 블로그를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시연은 어떤 블로그 하나를 발견했다. ‘젤리피쉬 서핑스쿨’ 이라는 제목의 블로그로, 한국인 여자 강사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다른 블로그에 올라온 후기를 읽어보니 친절하고 잘 가르쳐 주신다는 칭찬으로 가득했다. 안 그래도 전부터 서핑을 배워보고 싶었던 시연은 바로 블로그 프로필에 적힌 메신저 아이디를 추가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프로필 사진 속의 여자는 자기 몸 보다 훨씬 큰 서핑 보드를 끼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서핑 강습 예약하고 싶은데요 혼자도 되나요?]
[네 당연하죠! 발리는 언제 오세요?]
메시지를 보내자 마자 말 풍선 옆에 붙어 있던 1이 사라지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시연은 채팅창을 나가려다 말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다음 주요.]
일주일 뒤, 발리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시연을 반겼다.
*
발리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미리 전달 받은 픽업 시간에 맞춰 래쉬가드에 로브만 걸친 채로 호텔 로비에 앉아있던 시연을 데리러 온 것은 스쿠터 한 대를 끌고 온 여자였다. 벤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승용차로 데리러 올 줄 알았던 시연은 그 행색에 당황했지만 래쉬가드에 쪼리만 신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비로 성큼성큼 들어온 여자는 시연을 단번에 알아보고 자신을 김세정이라고 소개했다.
“박시연 씨? 맞으시죠.”
“네? 네.”
자신을 김세정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아직 당황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시연에게 역시 발리에서는 차 보다는 스쿠터라고 활짝 웃으며 여분의 헬멧을 건넸다.
“스쿠터 안 타봤어요?”
“네.”
“그럼 오늘부터 타보면 되죠. 뒤에 꽉 잡으세요.”
백미러 너머로 곱게 휘어져라 웃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
2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서핑 스팟으로 유명한 쿠타 비치였다. 세정은 어젯밤에 비가 와서 파도가 딱 타기 좋게 올라왔다며 날짜를 잘 잡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물에 들어 가기 전 간단한 준비운동을 했다. 세정은 워밍업에 국민체조만한 게 없다며 시연은 서핑 강습 두 시간이 채 안되어 나가떨어졌다. 준비 운동을 하고, 기본 자세를 배운 다음 호기롭게 보드 위에 엎드린 채로 바다 위에 떠 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일어서려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키면 그대로 물에 빠지기 일쑤였다. 파도가 올라오는 것에 맞춰 몸을 일으키면 된다고 하는데도 그게 잘 안됐다. 세정이 열 번도 넘게 시범을 보여줬으나 보기에만 쉬워 보였을 뿐이지 막상 직접 하려고 하면 금방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다에 빠져버렸다. 결국 파도에 휩쓸린 채로 백사장까지 떠 내려온 시연은 일으켜주려고 세정이 내민 손을 잡을 힘도 다 떨어져버렸다.
“시연 씨 체력 약하네요.”
“이거 원래 이렇게 다들 못해요?”
“바로 중심 잡는 분들도 있고, 시연 씨처럼 이러신 분들도 있고.”
세정은 ‘이러신’ 분을 강조하며 보드 위에 미역처럼 늘어져버린 시연을 가리키며 웃다가 시연의 오른 발목에 감겨 있던 리쉬를 풀었다. 시연은 갑작스런 해방감에 발목을 만지작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보드 위에 쭈그려 앉았다.
“이래가지고 내일도 할 수 있겠어요?”
“…모르겠어요.”
“평소에 운동 안했죠? 그러면 힘들어요 사실. 서핑 아니면 그냥 우붓 쪽으로 올라가서 사원 구경해도 좋고. 원숭이 사원 들어봤어요?”
“아니요.”
시연은 한숨을 쉬곤 다시 보드에 기대 누웠다. 작렬하는 햇빛에 젖어있던 몸이 금세 말랐다.
“진짜 아무 계획 없이 왔네요.”
“네 그냥, 뭐…”
“어, 비 온다.”
일광욕이라도 하려는 찰나 누워 있는 시연의 볼에 빗방울이 한두 개씩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세정과 시연은 근처에 쳐진 천막으로 몸을 피했다.
“지금은 건기인데 요즘 오락가락해요. 해는 쨍쨍한데 우박 떨어지고 그런다니까요.”
세정은 손바닥을 동그랗게 말아 천막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세정의 손바닥 안으로 순식간에 물이 차 올랐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할까요? 마사지 잘하는 데 데려다 줄 테니까 거기서 마사지 받고 들어가요. 근육 놀랜 거 안 풀어주면 내일 못 일어나요.”
이번엔 우비도 입어요. 세정은 스쿠터 트렁크를 열어 우비를 꺼내 시연의 어깨에 걸쳤다.
3.
스파에 마사지까지 받고 한껏 노곤해진 몸으로 호텔에 돌아온 시연은 침대 헤드에 기대 습관적으로 SNS를 켰다가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결혼식에 같이 갔던 동창들이 올린 신부대기실 사진이었다. 애써 잊고 있었던 것을 사진으로 다시 보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한참을 스크롤을 올렸다 내렸다 하기를 반복한 시연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던지듯 엎어버리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다. 기껏 잊어 보겠다고 혼자 날아왔더니 더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지난 연애의 순간들를 되새김질 하던 시연은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조용하게 혼자 있기보다는, 술집이든 클럽이든 어디든 시끄러운 곳에 들어가서 자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야 이 기분이 풀어질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르기안 거리 초입에서 내린 시연은 구글맵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었는데, 뒤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을 울리며 달려온 오토바이가 시연을 밀치고 들고 있던 클러치를 낚아 채 간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길 바닥에 넘어진 몸을 겨우 일으킨 시연은 절뚝거리며 제게서 먼 발치로 날아가버린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주인 무릎 따라 갔는지 이미 액정이 박살이 나 있었다. 여권과 지갑이 들어있던 클러치는 이미 소매치기의 스쿠터에 실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밀치며 지나가버린 탓에 걸려 넘어진 무릎은 박살이 났고, 손에서 놓친 핸드폰도 주인 따라서 박살이 났다. 시연은 제 상태가 너무 비참하고 짜증이 나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애초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차라리 그 애한테 전화해서 술 주정이나 부리는 게 백 배는 더 나았을텐데. 내가 혼자 여행을 와서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오만 가지의 부정적인 생각이 시연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와중에도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박시연이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 김세정.
시연은 낮에 세정의 스쿠터 뒷자리에 실려가며 지나쳤던 가게들을 되짚어보고, 걸어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서툰 영어로 물어가며 겨우겨우 세정의 서핑 스쿨을 찾아 걸었다. 이 상태에서 세정 마저 가게 문을 닫았으면 어쩌지, 돈도 없고 핸드폰도 안 되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러다간 꼼짝없이 밤새 길거리를 헤매게 될 지도 몰랐다. 한참을 헤매다 겨우 찾은 세정의 가게는 시연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CLOSE 팻말만 걸어 둔 채로 아직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시연은 조심스럽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에 걸어둔 종이 울리는 소리에 노트북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세정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손님에 놀란 눈치였다.
“어? 시연 씨?”
“세정 씨….”
“이 밤에 무슨 일… 아니 무릎 왜 그래요? 다쳤어요?”
“아까 골목 걸어 가는데… 소매치기가…아 진짜.”
한순간에 안도감이 든 시연은 긴장이 풀려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세정은 갑자기 우는 시연에 당황해 안절부절 못하다가 일단 의자를 내어 시연을 앉히고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식염수로 상처를 씻어내고, 빨간 소독약을 바르는 내내 시연은 눈을 질끈 감고 쓰라림을 참았다. 어느새 눈물을 다 그친 채였다.
“다친 거 말고, 뭐 잃어버린 건 없어요?”
“들고 있던 클러치를 들고 가 버려서… 여권이랑 지갑을 통째로 가져갔어요.”
“허.”
소독을 끝내고 폼을 붙이던 세정이 짧게 탄식했다.
“어떡해요, 저.”
“현금이야 잃어버린 셈치고, 카드는 정지하면 되고, 여권은 어쩔 수가 없는데.”
응급 처치를 끝낸 세정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 같더니 말을 이었다.
“여권 재발급 받으려면, 여기 말고 자카르타까지 가야해요. 여기엔 대사관이 없어서.”
“네?”
“일단, 경찰서 가서 신고 접수하고 리포트 만들어야 하니까 바로 나가요. 같이 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정은 일어나 시연에게 헬멧을 건넸다.
시연은 어느새 또 세정의 스쿠터 뒷자리에 실려 있었다. 새벽의 도로는 고요했고, 세정의 스쿠터 배기통이 털털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도로를 채웠다. 시연은 세정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경찰서에 도착한 세정은 경찰관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시연을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했다. 세정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관은 시연을 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는 서류를 내줬다.
“이거, 다 쓰면 돼요. 여기 펜있고… 다 대문자로 적어야 돼요.”
“네…”
시연은 세정이 건넨 서류를 받아 들고 구석 자리에 앉아 서류를 채워나갔다. 옆자리에 앉은 세정은 핸드폰을 꺼내 항공권 예약 어플로 국내선 시간표를 확인했다.
“리포트 받고, 대사관 가서 접수한 다음에, 이민국 가야 돼요.”
“네에…”
한참을 서류를 적어가던 시연은 또 앞길이 막막해졌다. 말도 통하고 현지 사정에 빠삭한 세정을 만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줄 알았는데, 여기서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니. 시연은 저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옆자리에서 그런 시연을 빤히 보던 세정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하다가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시연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가요, 대사관.”
“네… 네?!”
세정의 말에 놀란 시연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순간 틘 소음에 경찰서에 앉아있던 외국인들이 일제히 시연에게 시선이 쏠렸다. 순간의 정적에 세정은 그들을 향해 웃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정적은 일시에 다시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변했다.
“왜 그렇게 놀래요.”
“아니, 경찰서 같이 와주신 것도 감사한데 제가 또 어떻게 폐를 끼쳐요. 거긴 발리도 아니 라면서요.”
“어차피 저도 여권 연장하러 가야했어요. 저번 달에 순회 영사 온 걸 놓쳤거든요. 시연 씨랑 가면 안 심심하고 좋을 거 같은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그래도…”
“아, 진짜 괜찮아요. 부담 가지지 마요. 다음달엔 손님들 예약이 꽉 잡혀서 그래요. 이 번밖에 시간이 없어서.”
다 적었죠? 세정은 시연이 더 대꾸할 틈도 없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서류를 가져가 책상에 앉아있는 경찰관에게 건네고는 또 무어라고 열심히 떠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자리로 돌아온 세정은 시연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이거, 리포트예요. 대사관 가기 전 까지 여권 대신으로 쓰는 거. 이거 들고 대사관 가서 접수하면 돼요. 클라우드에 여권 사본 같은 건 저장 해놨어요?”
“아 그거는 클라우드에 백업 해놨어요.”
“다행이네요. 아까 보니까 새벽 비행기 있던데, 그거 타고 바로 가요.”
4.
세정과 시연은 그 길로 공항으로 가 가장 빨리 출발하는 자카르타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연은 멍한 표정으로 비행기 날개가 펴졌다 접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멍하게 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정이 생수 병을 건넸다.
“안 믿겨서요.”
“지금 이 상황이요?”
“네.”
“그럴 수도 있죠. 그래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마요. 여행이 그렇잖아요, 가끔 이런 이벤트도 있고.”
세정은 밤을 새서 피곤하다며 좌석 앞에 놓여있던 안대를 뜯어 착용하고는 좌석을 뒤로 빼고 누웠다. 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그대로 세정을 따라한 채로 좌석에 몸을 기댔다.
대사관까지의 여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동이 틀 무렵에 도착하더니, 세정은 공항 밖으로 빠져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 그대로 대사관으로 향했다. 길가에 울창한 야자수가 길게 뻗어 있던 발리와 다르게 자카르타는 야자수 대신 고층 빌딩이 즐비해 있었다. 택시에 앉아 창 밖 너머의 풍경을 지켜보던 시연은 멍한 얼굴로 이게 꿈인가 싶어 세정이 보지 못하게 제 볼을 살짝 꼬집었다. 역시 현실이라 볼이 아팠다.
*
두 사람은 대사관이 열기도 전에 앞에서 기다렸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접수했지만 서류를 받은 직원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두 시간 뒤에 다시 오라는 말을 건넸다.
“두 시간 기다리래요.”
“두 시간이나요?”
“여긴 원래 그래요. 한국처럼 그렇게 안 빨라요.”
기껏 일찍 왔더니 또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시연은 힘이 빠져 대기석에 엎어지 듯 기대 앉았다.
“배고프죠? 밥 먹으러 가요. 짬뽕 좋아해요?”
“짬뽕이요?”
세정은 전날 해변에서 시연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처럼 손을 내밀었다.
세정이 데리고 간 식당은 대사관 건물 근처에 자리한 한식당이었다. 가게 문을 들어서자 마자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이 낯설어 시연은 저도 모르게 세정의 뒤에 숨듯이 섰다. 세정은 카운터에 서 있던 사장과 안면이 있는지 입구에서부터 반갑게 인사하며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 받고는 자리에 앉았다.
“여긴 삼선 짬뽕이 맛있어요. 키조개 하나를 통째로 넣어주거든요.”
세정은 직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펼쳐보지도 않고 곧바로 삼선 짬뽕 두 그릇을 주문했다.
-여기 삼선짬뽕이랑 탕수육 하나요.
-왜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시켜.’
-어차피 내가 시켜준 대로 먹을 거면서.’
-그래도.’
-그럼 넌 뭐 먹고 싶은데?’
-삼선 짬뽕.
-거 봐.
시연 앞에 김이 펄펄 나는 짬뽕 그릇이 앞에 놓이자 마자 웃기게도 그 애 생각이 났다. 일상에서 드문드문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다 잊어보겠다고 혼자 온 여행에서, 거기에 여권 다시 받겠다고 온 이 상황에서마저 생각이 날 줄은 몰랐다. 그릇만 바라본 채 멍하니 있으려니 맞은편에 있던 세정이 시연의 그릇에 올려져 있던 키 조개를 덜어갔다.
“밥이 안 넘어가는 상황이라는 거, 잘 알아요.”
“…….”
“그래도 먹어야, 뭐든 할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요.”
제가 도와 줄게요. 세정은 덜어간 키 조개를 먹기 좋게 발라내어 다시 시연의 그릇에 얹었다. 시연은 그제서야 젓가락을 들었다.
*
두 시간 뒤에 오라던 대사관은 또 늑장을 부렸다. 한참을 더 기다린 후 서류를 받아 이민국으로 넘어가서 또 몇 시간을 기다려 임시 여권을 발급받고 나니 이미 해가 떨어진 뒤였다. 이민국을 나서며 항공권 어플을 살펴보던 세정은 밤 비행기 자리가 남았다며 바로 공항으로 가자고 택시를 잡았다.
“오늘 고생했어요.”
“아니 세정 씨가 더 고생하셨죠… 저 때문에 자카르타 까지 오시고…”
미안한 마음에 시연은 말끝을 흐렸다.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하면 좋겠어요. 발리 가면 밥 사줘요 그러면.”
“그럴 게요, 진짜로.”
“그럼 완전 비싼 거 사달라고 해야지.”
세정은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바로 농담이라며 웃었다. 너무 비싼 건 말고, 적당한 걸로 사달라고 할 거예요.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는 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두어 시간을 날아 발리 공항에서 나오니 자카르타에 있었던 고층 빌딩들은 간데없고 다시 즐비한 야자수가 세정과 시연을 맞았다. 세정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능숙하게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시연이 묵고 있는 호텔을 말했다. 꼬박 하루가 지났다.
공항에서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내내 시연은 세정에게 어떤 말을 더 해야할까 고민했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로는 스스로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고, 당연한 감정을 굳이 남사스러운 인사말로 표현하는 게 오히려 진심을 깎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 시연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세정은 피곤한지 어느새 골아 떨어져 있었다.
*
공항에서 출발한 택시는 한적한 밤 도로를 달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연이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오늘 고생했어요.”
“세정 씨도요. 진짜, 정말 오늘 저 때문에 너무 고생하시고 진짜 감사해요.”
“무릎이 그래서… 이제 서핑은 안되니까, 호텔에서 쉬어요. 맛집이나 그런 거, 모르는 거 있으면 톡 보내고요.”
“네.”
“들어가요.”
세정은 아직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시연의 무릎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시연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택시의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연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호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벨보이가 열어준 문을 지나 로비를 가로 질러가던 시연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때, 세정이 탄 택시는 아직 그대로 서 있었다. 시연은 혹시라도 세정이 출발해 버릴까 얕은 뜀박질로 로비로 나와 세정을 불렀다.
“두고 내린 거 있어요?”
“그게 아니고요…”
“그럼요?”
세정은 시연이 급하게 뛰어 나오는 것을 보고 올리고 있던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저기 세정 씨, 저 때문에 자카르타도 같이 다녀오시고 저 도와주느라 하루 종일 고생하시고 피곤하신 건 잘 알겠지만…”
시연이 습관처럼 입술을 말아 입을 다물었다. 세정은 시연의 말을 기다리겠다는 듯 조수석 창문을 연 채로 기다렸다.
“지금 밥 먹을래요? 제가 비싼 걸로 살게요.”
“…그 말을 기다렸어요.”
세정은 시연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조수석에서 내려 택시를 보냈다.
5.
호텔 레스토랑도 다 닫은 늦은 시간이라 세정과 시연은 호텔 상층부에 있는 바에 자리를 잡았다. 세정은 바텐더로 일하는 직원과 친구 사이라며 들어가자 마자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주고 받더니, 서비스로 받았다며 얼음이 든 바켓 가득 맥주를 담아왔다.
“아는 사람이 많으시네요.”
“그냥 여기서 구르고 살다 보니까, 되더라고요. 저 처음엔 말 한 마디도 못했어요.”
서핑 스쿨 차리는 것도 처음엔 엄청 힘들었어요. 해변에 있는 서퍼들 텃세가 얼마나 심했는데요. 세정이 손사래를 치며 능숙하게 맥주병을 따 시연에게 건넸다. 가볍게 병을 부딪치자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왜 혼자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네?”
“아니 그냥, 시연 씨는 혼자 여행 올 타입은 아닌 거 같아서요. 별 뜻은 없으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요.”
세정이 마지막 맥주를 따며 말했다. 이미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바켓 가득 들어있던 얼음은 거의 다 녹아 흥건한 물이 되어 있었고, 테이블엔 빈 맥주병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세정은 바를 향해 직원을 불렀지만 이른 늦은 새벽이라 어딜 갔는지 대꾸가 없었다.
“그냥… 정리하고 싶어서요.”
“정리요?”
“네 그냥. 모든 것들.”
시연은 술이 들어가 알딸딸해진 기분 탓에 덩달아 솔직해진 건지, 아니면 여행지에서 보고 두 번은 안 볼 사람이라 안심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정이라면 그간의 모든 이야기들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제가 사실 저번 주에…”
시연은 결국 지난 일들을 모두 세정에게 털어놓았다. 이십 대 초중반을 함께한 그 애와 제대로 된 이유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헤어졌던 일, 헤어진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청첩장을 받고 와 달라는 그 말 한마디에 식장 까지 찾아간 일, 결국 혼자 술을 마시다 술김에 항공권을 결제해버린 일까지… 세정은 시연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턱을 괴고 앉아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한참이나 얘기하던 시연이 마침내 말을 끝맺었을 때, 세정이 들고 왔던 바켓 속의 얼음은 이미 다 녹아 맺힌 물방울이 테이블을 적셨다.
“괜찮아졌어요?”
“네.”
“그럼 다행이에요.”
“이 얘기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요.”
“이제 여기 있네요.”
세정은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맥주병을 치웠다.
“그럼 이제 여기서 다 잊어버리고 가요.”
“…….”
“잘 왔어요. 물론 여기서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젠 해결 됐으니까, 남은 시간 잘 놀다가 가요.”
이제 슬슬 마무리 하고 들어 가자며 세정이 잔을 들었다.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한적한 바 안에 울렸다.
“참, 시연 씨가 비밀 하나 말해줬으니까, 나도 비밀 하나 말 할게요.”
“뭔데요?”
“저 사실 자카르타 갈 필요 없었어요. 다음 주에 순회 영사 오거든요.”
*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이 됐다. 데스크엔 당직으로 보이는 직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나머지 직원들은 퇴근 했는지 로비는 한적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시연은 카드 키를 대고 객실의 층수를 눌렀다. 문이 닫히자 마자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투명한 창 밖으로 호텔의 전경이 보였다. 이 나라에 온 지 며칠이나 됐지만, 여전히 눈에 익지 않은 낯선 풍경이었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멍하니 밖을 보던 시연이 세정에게 물었다.
“여기서 사는 건 어때요?”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요.”
“매일이 여름 같아요. 일년 내내 더운 나라니까 여름이 맞긴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는 아니에요.”
세정의 대답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복도를 가로 질러 객실까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은 뭐할 거예요?”
“일단 좀 자고… 글쎄요. 뭐하죠?”
“무릎이 그래서 서핑은 이제 안되잖아요.”
객실 앞에 도착한 시연은 문고리에 카드 키를 갖다 댔다.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연은 객실 문을 반쯤 열었으나 선뜻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세정은 푹 쉬고 내일 보자는 인사를 건네곤 다시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시연은 문을 닫지 않은 채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 세정을 보다 결심한 듯 세정을 불렀다.
“그냥 갈 거예요?”
시연의 부름에 세정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요?”
세정은 이번엔 몸을 돌려 시연의 방 쪽으로 다시 걸어왔다.
“그걸 말해야 알아요?”
“아니요.”
방 문이 닫혔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입술이 맞물렸다.
6.
시연은 다음 날 눈을 뜨면 세정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시연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아침이 되어서도 세정은 시연의 옆에 잠들어 있었고, 세정의 등에 남은 손톱 자국이 어젯밤의 일을 생생히 기억나게 했다. 시연은 부끄러워져 다시 이불을 머리 끝까지 쓰고 돌아 누웠지만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에 깬 세정은 자연스럽게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시연에게 잘 잤냐고 물었다.
둘은 마치 함께 여행을 온 연인처럼 굴었다. 자연스럽게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조식을 먹고 호텔 건물을 둘러싸고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를 걸었다. 말 없이 걷고 있는데, 산책로에서 마주친 호텔 직원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직원은 바나나 잎을 엮어 손바닥 크기로 만든 그릇에 꽃과 태운 향초를 담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연은 세정에게 물었다.
“나 발리 와서 저거 되게 많이 봤는데, 저거 뭐하는 거예요?”
“어 저거, 발리 사람들이 매일 아침마다 하는 거예요. 짜낭이라고 하는데, 안에 쌀이랑 과일이랑, 꽃이랑 그런 거 넣고, 신한테 기도하는 거예요. 제사 비슷하게.”
한 번 해 볼래요? 세정은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유창한 현지어로 뭐라고 말을 건넸다. 세정의 말을 듣던 직원은 순순히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건넸다.
“뭐라고 했어요?”
“신한테 기도 하고 싶다고 했어요.”
세정은 바닥에 그릇을 내려 놓고 향초에 불을 붙였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 덕에 향은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피어 올랐다. 알싸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그럼 그 꽃은 뭐예요?”
시연은 향초 옆에 아무렇게나 놓인 꽃잎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거요. 플루메리아라고, 여기서 제일 흔하게 피는 꽃이에요. 몇 송이씩 따서 같이 피워요.”
“그렇구나.”
“이거 꽃말이 뭔지 알아요?”
“뭔데요?”
“사실 저도 몰라요.”
세정은 더 말을 하지 않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 모습을 본 시연도 더 묻지 않고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
잠깐의 산책을 마친 두 사람은 화장을 고친다는 이유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가, 날이 다 지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연은 문득 자기가 있는 이 곳이 한국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발코니 너머 길게 뻗은 야자수가 아직 외국에 있음을 실감케 했다.
매 번의 행위들이 끝날 때마다, 세정은 시연에게 여기서 모든 걸 잊고 가라고 말했다. 시연은 세정이 말한, 여기서 잊어야 하는 그 모든 것에 김세정이라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때마다 세정의 목에 더욱 단단히 팔을 감는 것으로 그 물음을 대신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여기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내일 비행기 몇 시에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잠들고 일어나니 창 밖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시연 쪽으로 돌아누워 손가락으로 시연의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넘기던 세정이 막 잠에서 깬 시연에게 물었다.
“…세 시요.”
“공항까지 데려다 줄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마지막이잖아요.”
말이 끝나자 세정은 다시 시연의 위에 올라타 이마에 입을 맞췄다.
*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세정은 옆에 없었다. 시연은 전 날 새벽 세정이 저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던 그 말의 결말이 결국 이런 거였나 싶어 허탈한 마음으로 이불을 걷었다. 꿈 같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더 만날 사람도 아니었으므로 나름 좋은 결말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에 맞춰 체크아웃을 하러 내려오니 시연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세정은 로비 앞 소파에 앉아 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 줄 알았어요.”
“가게에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왔어요. 간 김에 옷도 갈아 입었고… 톡 보내놨는데.”
“아, 액정이 깨져서 못 봤어요.”
“아, 그랬었죠.”
세정은 머쓱하게 웃더니 시연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넘겨받아 트렁크에 실었다. 시연이 조수석에 타고, 세정이 다시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킬 때까지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안 데려다 주셔도 되는데.”
출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먼저 말을 건 것은 시연이었다. 사거리의 신호 대기는 생각보다 길었다. 세정은 대답하는 대신 사이드미러를 이리저리 넘겼다. 사이드 미러로 시선이 마주쳤다.
“마지막이잖아요.”
시연은 세정이 웃을 때마다 눈이 정말 곱게 휘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걸 지금에 와서 알아 봤자 바뀔 것은 없었다.
*
공항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려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는 동안 세정은 말 없이 옆에 서 있었다. 그 동안 시연은 세정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보자는 말, 고마웠다는 말, 잘 지내라는 말, 한국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는 말 같은 흔하디 흔한 인사말도 선뜻 꺼내기 어려웠다. 시연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사이 두 사람은 출국장 앞에 도착했고 시연은 직원에게 들고 있던 여권과 항공권을 내밀었다.
“잘 가요.”
결국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세정이었다. 세정은 여기에 사는 사람이고, 별 일이 없는 이상 여기에 쭉 있을 것이다. 그런 세정이 시연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연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여권 사진과 시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직원은 확인했다는 듯 바로 들어가라는 뜻으로 고갯짓을 했다.
“들어가요, 이제.”
“네.”
시연은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머리 속에 맴도는 많은 말들은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시연은 겨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내내 고마웠어요.”
시연이 고르고 골라 뱉은 마지막 인사는 결국 고맙다는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랬더니 이젠 고맙다는 말만 하네요.”
“그러게요.”
“정리는 됐어요?”
“…네.”
시연은 세정에게, 여기에 머무는 동안 정리해야 했던 많은 일과 사람들 사이에 김세정도 있는 지는 끝까지 묻지 않았다.
시연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들어갔다. 출국장으로 들어간 시연은 세정이 문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정은 시연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내 시연은 이번 여행을 생각했다. 출발 전 많은 일과, 처음부터 세정과 함께였던 여행이라 온통 세정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세정을 처음부터 한국에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가정했다가, 한국이었다면 처음부터 만날 일도 없었을 거라고 애써 넘겼다.
7.
“시연아, 이거 캔들 향 되게 좋다. 무슨 꽃이야?”
“아 그거, 플루메리아래.”
입사 동기인 희진이 시연이 사무실에 돌린 기념품을 뜯다 보다 말고 향을 맡더니 너무 좋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면세점에서 급하게 산 캔들이었다.
“처음 들어봐. 근데 향 되게 좋다. 여기서 피워도 되지?”
“응.”
시연의 허락을 구한 희진은 바로 라이터를 꺼내 캔들에 불을 붙였다. 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플루메리아 향으로 가득 찼다.
-이거 꽃말이 뭔지 알아요?
-뭔데요?
-사실 저도 몰라요.
시연은 호텔 산책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름도 모를 야자수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던 그 곳에서, 향을 피우고 그 연기를 바라보며 지그시 눈을 감고 기도했던 그 순간. 시연은 종교도 없으면서 막연히 어딘가에 있을 신이 기도를 들어주길 바랐다. 그 때 시연과 세정은 서로 무엇을 빌었는 지는 묻지 않았다. 시연은 그 때 세정이 알려줬던 꽃이 생각나 검색 창에 플루메리아를 쳤다. 가장 상단에 떠 있는 사이트를 클릭하니 플루메리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왔다.
‘8m 정도의 나무 모양으로 자라며 녹색의 잎은 길이가 30~40cm 정도. 황백색의 향기 나는 꽃이 핀다. 개화 후 2~3개의 가지가 개화지 끝 부분으로부터 발달한다….’
그 때의 세정은 정말 플루메리아의 꽃말을 몰랐을까? 시연은 차마 창을 내리지 못한 채로 한참이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발리에서 깨졌던 액정은 한국에 오자마자 고쳤고, 다친 무릎도 다 아물었지만, 세정과 연락을 했던 채팅 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시연은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며 세정에게 연락을 할 지 고민했지만, 결국 연락하지 않았다. 대신 세정이 생각날 때마다 서핑 스쿨의 후기 글을 찾아보는 것을 택했다. 그 사이 손님이 여럿 다녀 갔는지 블로그 후기가 늘어나 있었고, 개중엔 손님들과 찍은 단체 사진도 올라와 있었는데, 사진 속의 세정은 롱 보드를 한 손으로 들고 한껏 포즈를 잡고 있었다. 시연은 모니터 속 세정의 모습을 보다가 다른 직원이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창을 껐다.
*
시연이 발리에 다녀온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입하를 알려주던 기상 캐스터는 한껏 짧아진 차림으로 전국에 폭염 주의보가 발령될 것이라고 전했다. 장마가 지나간 한국은 그야말로 불덩이 그 자체였다. 완전히 여름이었다.
“시연아, 이번에 여름 휴가 어디 갈 거야?”
맞은편에 앉은 희진이 시연에게 수저와 물컵을 챙겨주며 물었다.
“휴가는 저번에 발리 다녀온다고 써서, 이번엔 안 갈 거 같애.”
“아 발리 갔었지 참. 갑자기 너가 휴가 내서 나 그때 힘들었잖아.”
“미안.”
“됐고. 발리는 지금보다 더 더워?”
“비슷해.”
회사 건물이 밀집한 식당가는 점심시간이 되자 어느 한 곳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입맛이 없어 점심을 거르려고 했던 시연은 전 날 달려서 해장이 필요하다는 희진의 손에 이끌려 새로 열었다는 중국집에 끌려오 듯 들어와 앉았다.
“어제 김 대리님이 여기서 먹었는데 짬뽕이 대박이래. 키조개 얹어준다고.”
“키조개?”
“어어, 여기 체인일 걸. 물론 냉동인 거 쓰겠지만.”
희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홀 직원이 시연의 눈 앞에 김이 펄펄 나는 짬뽕 그릇을 놓으며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들어갔다.
“아 진짜 크다. 대박.”
희진은 국물을 한 숟갈 떠 먹더니 한껏 감동받은 표정으로 이제야 살겠다며 앞 접시에 키조개를 덜어 살을 발라냈다. 시연은 수저를 들 생각도 않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안 먹어?”
“어? 어, 아니, 먹어야지.”
시연은 희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젓가락을 들었다.
- 여긴 삼선 짬뽕이 맛있어요. 키조개 하나를 통째로 넣어주거든요.
자카르타에서, 그 이국적인 도시에 안 어울리게 태극 문양으로 점철된 인테리어의 한식당에서 제 맞은편에 앉아 밥을 먹어야 힘을 내서 뭐라도 한다며,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조개 살을 발라 덜어주던 세정이 생각났다. 시연은 예전 같았다면 당연히 그 애를 떠올렸겠지만, 이제는 세정이 먼저 떠올랐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왜 웃어?”
“어?”
“아니 짬뽕 보고 웃고 있길래. 피곤해?”
희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연의 눈 앞에 대고 들고 있던 젓가락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시연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내가 웃었어?”
“어. 실실 웃던데.”
더위 먹어서 실성할 거 같으면 반차 내고 퇴근 해. 말을 마친 희진은 다시 짬뽕에 집중했다.
시연은 결국 짬뽕을 반 넘게 남겼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던 희진은 자기가 피곤한 애 끌고 와서 먹인 게 아니냐며 미안해했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려 여름 휴가로 고민하는 희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은 그늘 하나 없이 해가 쨍쨍했다. 시연은 커피를 들지 않은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얼굴을 가린 채 걸었다. 점심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오랜만에 세정의 블로그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점심에 짬뽕 먹어서 그런가? 사무실에 냄새 나는 거 같애. 시연아 전에 줬던 캔들 남은 거 있어? 그거 잠깐만 피우자.”
“아, 여기.”
시연은 서랍에 뒀던 캔들을 꺼내 희진에게 건넸다. 캔들을 건네 받은 희진은 초에 불을 붙이고 바람이 잘 드는 창가에 올려놓았다. 한여름의 날씨와 잘 어울리는 꽃 향기가 사무실을 감쌌다. 발리에서 기념품으로 사온 마지막 캔들이었다. 시연은 이내 창가에서 눈길을 거두고 이미 수십 번이고 들어갔던 세정의 블로그를 열었다. 블로그 창을 여니 메인 화면에 웬 공지사항이 떴다.
<8월 임시 휴무 안내>
제가 잠깐 한국에 들어 가게 돼서 8월 한 달은 서핑 스쿨 쉽니다! 9월에 다시 만나요! 예약 문의는 톡으로 계속 받고 있습니다.
시연의 눈 앞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휴무 공지였다. 심지어 올라온 시간은 불과 30분 전이었다. 세정이 한국에 온다고? 시연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수없이 되돌려가며 생각했던 가정을 다시 떠올렸다. 세정을 발리가 아닌 한국에서 만났다면, 무엇이 더 달라졌을까 하는 상상. 마우스를 쥐고 있던 손이 순식간에 땀으로 젖었다.
[시연 씨 잘 지냈어요? 나 잠깐 한국 들어가는데 시간 되면 잠깐 볼래요?]
컴퓨터에 깔아둔 메신저 팝업으로 익숙하지만 낯선 이름이 떴다. 시연은 마치 세정이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번쩍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혹시라도 뒤에 누가 지나가지 않을 지 주위를 살폈지만,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지 조용했다. 시연은 티 나지 않게 일부러 업무 창을 몇 개 더 띄워 놓고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한국은 언제 오는데요?]
답장을 보내자 마자 1이 사라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주요.]
세정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자기 몸보다 큰 보드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은 그대로였다. 발리가 아닌 한국에서 세정을 만났다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가정하던 수많은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연락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단정하던 날들도 떠올랐다. 끝까지 모른 척하며 알려주지 않았던 꽃말도. 그 의미를 나중에 알고 나서도 바뀌는 건 없을 거라고 고개를 저었던 날도.
열어둔 창문 사이로 매미의 쨍쨍한 울음소리가 캔들 향을 타고 넘어 들어왔다.
아직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