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세계에 들어온 너를 깨닫고 나는 너를 밀어내려 했다. 내 세계에 들여 마음을 준 대상들이, 영원한 나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내 감정을 묶어버리려고 노력했다. 홀로 남아 떠나보낸 이들을 기억하는 일은 몇 번을 겪어도 무뎌질 수 없었고, 나를 집어삼키는 감정의 일련들을 마주하는 게 겁이 났다. 혼자 남아 지독히도 외로운 시간을 견디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의 세계는 그렇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나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이 어떻게 그리도 쉬웠는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 시선으로 하여금 시도 때도 없이 너를 좇게 만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네가 내 눈에 담긴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너의 얼굴을 꼼꼼히 관찰했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아는 네 얼굴은 늘 웃고 있었다. 그냥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할 때도, 너의 말에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어도, 주변에 사람이 많은 너를 좋아하는 이들이 나를 이상한 아이라 칭해도 너는 늘 나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나의 이름을 불렀다. `박시연.` 혹은 `시연아.` 그 세 글자가 나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들어본 적 없는 따뜻한 음성이 부르는 나의 이름은, 마치 내가 소중하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너의 웃음은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시연아, 방학 잘 보냈어?”
몇 번째 다니고 있는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고등학교 1학년의 여름 방학이 지나 2학기가 되었을 때, 네가 나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으리란 기대는 없었다. 개학 날 맨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너는,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든 나를 보며 방학 잘 보냈냐는 인사를 건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넌 언제나처럼 웃었고, 그 순간 내 모든 감각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삶에서 유달리 신경 쓰이는 사람이 다시 한 번 생겼구나, 내가 의도적으로 잊지 않는 이상 끝의 끝까지 너를 기억하고 살아가겠구나. 이어지는 생각에도 애써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보고 싶었어.’ 그 목소리에 몸 전체가 울렁거렸다. 반년이 어서 지나가길 바랐다.
내가 느끼는 만큼 네게도 내가 특별한 존재일 수 있다는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와 같았다. 내 시선을 끌고 내 신경을 빼앗은 너의 다정함이 오롯이 나의 것이 아니었기에 쉽게 기대를 접을 수 있었다. 모두에게 동일한 양의 친절과 다정함을 베푸는 너를 지켜보며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더 큰 호의를 원하고 네게 다가가 특별한 사이가 되어버린 후에는 무엇이 남는지 생각해보면 다가갈 결심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울이 지나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네게 쏟아지는 신경을 애써 다른 데로 돌리려 하지 않았다. 나 혼자만 가져갈 기억이라도, 오래 추억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모습을 알고 싶었다.
“시연아, 보고 싶을 거야”
이별의 순간마저도 네 목소리는 따뜻했다.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혼자 사는 집 앞에 찾아와 내가 보고 싶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 너에게 나도 그럴 거라고, 한동안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 날도 네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더 오래, 더 많이 너를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 날도 참을성 있게 내 대답을 기다려주던 너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도톰한 목도리 안에 반쯤 가려진 입술이 웃었고, 그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네 입에서 흘러나와 흩어지는 따뜻한 숨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둘러준 너는 잘 지내라는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손을 들어 네가 둘러준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따뜻했다. 그러나 차가운 공기와 내 체온에 닿아 금방 식어버렸다. 수백 번의 겨울을 지나면서도 춥다고 느낀 적이 없었음에도, 그 날은 추웠다. 네 덕에 따뜻함을 알아 추운 것도 알게 되었다.
*
너와 이별한 겨울의 다음 해 봄, 한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살면서 모은 돈과 지식은 충분했고 어딜 가 살아도 당분간은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을 정도였다. 지중해 인근의 한 항구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 숱해 무던해질 법도 했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 전에 살던 곳을 잊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무한히 주어진 시간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또 그 고통을 잊게 했다.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너와 이별한 겨울의 추위를 기억하는 일은 잦아들었다.
일 년 내내 따뜻한 기후가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온도를 느끼는 건 아니었지만, 매일 오후 햇살에 비쳐 노랗게 빛나는 바다를 보면 따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를 품은 바다를 보고 있으면 문득 네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에서 느꼈던 온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는 온기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네가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노을이 지는 매일 오후 네 생각을 하던 예전에 비하면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네 생각이 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너의 기억을 덮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하룻밤을 꼬박 다 써버렸다.
우연히도 너를 다시 만난 날 또한 겨울이었다. 이제는 내가 쓰는 섬유유연제 향만이 남아버린, 너의 목도리에 고개를 묻은 채 어스름이 내려앉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겨울의 오후는 금세 해가 사라져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이 적었다. 추위를 느끼지도 않으니, 산책을 하기엔 더 좋았다. 적막한 거리는 조그만 소리에도 큰 파동이 일었다. 낙엽들이 길바닥을 쓸고 가는 소리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박시연?’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곧바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듣지 못해 이젠 조금 낯설어져버린 한국말이었음에도, 나의 이름 석 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단번에 내 귀를 사로잡았다. 고개를 든 내 앞에, 커다란 캐리어를 한 손에 끌고 서 있는 건 분명 너였다.
열일곱 살의 어느 하루라는 시간을 수백 번 겪으면서, 그 날이 그 날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너와 다시 마주친 순간, 너와 이별했던 날이 마치 단 한 번 겪어본 것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조우는 너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나를 먼저 불러놓고 말이 없었다. 너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긴 머리를 하고 있었고, 젖살이 빠져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교복이 아닌 사복을 예쁘게 차려입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인 모습에 내 표정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바뀌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너의 웃음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나를 보며 너는 예전과 같이 웃었다. 변해가는 게 당연한 너에게서 변하지 않은 것을 찾고, 변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안도하는 내가 한심했다. 일부러 덮어두었던 너를 다시 마주친 순간, 네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시연이 너는 하나도 안 변했다. 아직도 고등학생 같아.”
숙소를 찾지 못했다던 너를 내 집에 데려와 방 하나를 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하게 마주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아직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렇게 별다른 대화 없이 잠들었던 전날 밤에 비해 아침을 먹으며 마주 본 너는, 거의 10년에 가까운 공백이 주는 어색함은 금세 잊었는지 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게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네게, 너 또한 그렇다고, 여전히 예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다만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나의 못난 마음이, 변해가는 너를 부러워하는 탓에 그 말을 꾹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너는 내가 묻질 않아도 자연스레 너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전공을 선택했는지,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어떤 일들을 했는지,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시시콜콜한 모험담을 늘어놓는 아이처럼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나는 관심 없는 듯 행동했지만, 실은 내가 보지 못한 동안의 네가 너무도 궁금해서 한 시도 쉬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종내 사진 촬영과 영상 제작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말을 끝내고, 너무 제 얘기만 했다며 머쓱하게 사과하는 네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차마 더 이야기해달라는 말은 하지 못한 채 재밌었다는 건조한 감상을 남겼다.
네가 이야기한 너의 시간들은 새롭고 빛나는 기억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에겐 온전히 새로운 것들은 아니었지만, 내가 언젠가 겪어본 적 있는 일들도 네가 이야기하면 모두 새롭고 반짝거리게 느껴졌다. 그래서 네가 부러웠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너의 시간은, 앨범에 차례대로 정리된 사진처럼 바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달려도 같은 자리를 맴도는 나의 시간과 달리, 자신이 빛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야 할 때가 되면 아름다운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날 것이 분명했다.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품을 수 있는 너의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다. 나의 긴 시간을 누군가 함께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아쉽도록 짧게 끝나는 삶을 함께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다른 이의 짧은 시간이 부러워졌다.
*
오래 머무를 생각으로 왔다는 너는 이곳 생활에 금세 적응했다. 너를 곁에 오래 두고 볼 수 있다는 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 눈앞에 네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우리가 단 한 번 동갑이었을 때처럼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좋아할 기회를 다시 한 번 허망하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마음을 주지 않음으로써 상처를 받지 않으려 했던 과거의 나를 비웃듯이 나는 하루가 다르게 네게 온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태어나 처음 사랑을 해본 아이처럼 너의 눈짓, 목소리, 행동,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걸 다 주고,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주려 했다.
너에게도 조금씩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 혼자 독점할 수 없어 좌절했던 너의 다정함이 점점 내게로 향하는 양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긴 했지만 따뜻한 눈빛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 세심한 행동 하나가 나에게로 와 닿았다. 네 눈에 내가 담기는 시간이 늘어나고, `우리`와 `함께`라는 말을 더 사용했다. 이제는 충분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음에도, 어쩌다 한 번 내게 닿는 손길마저 조심스러워 하는 네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런 너와 함께 하는 매일 매일이 행복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 끝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연아, 나는 가끔 불안해."
"... ..."
"너한테 내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까 봐."
내 맘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아니면 너도 비슷한 불안함을 느끼는 건지 너는 그런 말을 했다. 젖은 눈으로 내게 말하는 너를 보며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예전에 네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손을 뻗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한때는 내가 네 기억에 그저 그런 사람으로 남을까 두려워했다는 걸 알까. 불안함을 온통 티 내는 아이 같은 얼굴을 더 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는 말없이 눈을 맞췄다. 말과 표현이 적은 나를 대하면서도 불안해하지 않던 네가, 내 눈에 담긴 내 마음을 그대로 느끼고 불안을 떨칠 수 있길 바라며.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너는 입가에 슬몃 웃음을 띄웠다. 너의 웃음은 몇 번이고 눈에 담아도 벅차도록 사랑스러웠다. 너의 웃고 있는 입술에 내 마음을 온전히 담은 입맞춤을 건넸다.
그 뒤로도 너는 나에게 네가 잠깐 스쳐 가는 사사로운 존재가 아닌지 가끔씩 묻곤 했다. 너의 불안함을 유발하는 게 나라는 걸 알기에 미안했다. 그리고 그런 너를 달래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어떤 대답을 꺼내놓기가 어려웠다. 나로 인한 너의 불안함을 마주할 때마다, 진실을 털어놓을 타이밍만 노리다가 번번이 때를 놓쳤다. 그렇게 널 사랑한다는 표현을 마음껏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절대 너의 무게가 나에게 사사로워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무거웠다. 그 이전에, 한참 이전에도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에 비하면 너와 함께 한 시간은 지극히도 짧은데도, 이상하게도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용기 내어 네게 진실을 말하고 사랑을 표현했어야 했다. 나를 온전히 드러내어 결국 네가 날 떠나더라도 너를 이유 없이 불안하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언제나와 같이 내가 직접적인 말이 없어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를 사랑해줄 거라고 생각한 건 나의 오만이었다. 아마 서서히 차갑게 식어갔을 너의 마음은, 내가 깨달았을 땐 이미 되돌리기에 늦어버린 상태였다. 네가 주는 친절한 사랑에 안심한 나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사랑은 이기적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시연아.` 평소와 다름없는 그 다정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의 두 번째 이별을 직감했다. 한없이 따뜻한 너의 음성과 달리 너의 눈에서는 예전과 같은 온기가 보이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불러놓고 다음 할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너는 그 순간마저도 내게 사랑스러웠다. 눈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간 채로, 마음에 담아둔 말을 하지 못해 애꿎은 입술을 몇 번이고 들썩이는 너를 차분히 기다렸다. 네가 늘 나를 기다려주었던 것처럼, 네 말을 기다렸다. 결국 너는 온 얼굴을 눈물로 적시며 내게 이별을 고했다. 끝까지 모질지 못한 너를 보며 나는 웃고 말았다.
"상처받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을 주지 않는 거야."
어리석은 방법이라고 과거의 나를 비웃었음에도 혹시나 네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며 나는 그런 무례한 말을 최대한 덤덤히 뱉어냈다. 다행히도 내 목소리는 떨리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흘러나왔다. 나는 착한 네가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너보다 더 많이, 더 큰 사랑을 주는 사람을 만나 네가 상처를 덜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라면 그런 내 말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음에도, 너는 내 품에 안겨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그뿐이었고 우리의 끝 또한 그뿐이었다.
*
우리의 관계가 끝을 맞이했던 탓인지, 정해져 있던 수순이었던 건지 너는 곧 이곳을 떠났다. 내가 살고 있던 도시에서 너만 사라졌을 뿐인데, 나에게는 커다란 빈 공간이 생겨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어딜 가도 너와 함께 했던 기억들뿐이었고 네가 이곳에 오기 전에도 일상처럼 했던 행동들에서도 네가 주었던 행복을 떠올렸다. 차라리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너의 빈자리가 너무도 컸다. 그러나 네게 다시 돌아와 달라고 하기엔, 너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나의 욕심으로 얼룩지게 하는 것 같아 싫었다. 내가 눈물로 매달리며 너의 모든 삶을 내게 달라고, 나의 영원한 시간을 함께 해달라고 붙잡으면 착한 네가 날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수차례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나는 네게 그런 말을 꺼낼 용기조차 없었다.
나의 삶에 꽤 깊게 들어와 있던 너를 떠올리고 괴로워하며 또다시 열 번의 계절이 반복되었다. 일부러 너의 행적을 궁금해하지도, 찾지도 않았다. 헤어진 직후에나 아마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너의 흔적이 남은 이곳에서 너를 떠올릴 때는, 사랑받을 구석이 가득한 네가 다른 누군가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거라 상상하며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했다. 그럼에도 때때로 하루 종일 네 생각을 지우지 못할 때면, 네게 더 잘 해주지 못한 일들을 후회하며 나를 책망하기도 했다. 언제쯤이 되어야 너를 떠올리는 일이 덤덤해질까 그런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 너를 추억하는 일은 내 삶에 얼마 없는 웃음을 짓게 하는 일이라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너를 정말 기억에서 지울 날이 올까 봐 무서워졌다.
너와의 기억이 가득한 곳에서 괴로워하면서도 계속 머물렀던 이유는, 다시 여기서 널 보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10년을 거슬러 나의 집 주소로 배달된 타임캡슐이 너에 대한 미련을 부추겼다. 꽤 큰 캡슐 안에 넣어둔 사진과 편지들은 우리의 빛나는 한때를 담고 있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이러면 안 된다고 수없이 생각하면서도 꽤 만족스러웠던 항구 도시에서의 생활을 쉽게 정리했다. 이곳에서 사는 동안 외모가 변하지 않는 나를 보고 뱀파이어 같은 게 아니냐고 농담조로 묻곤 하던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내게 어느 정도 때가 되어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이사를 하는 게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에겐 설마 하는 정도의 농담이었겠지만 그들의 말이 일부 사실이었기에 나는 따라 웃지 못하고 내 나이가 원래 그닥 많지 않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너를 떠올렸다. 이제는 너를 만나 나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너를 만날 수 있을까.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살던 집을 찾았다. 너를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를 오가고, 돌아와서는 네 생각을 하고, 우리가 처음 이별을 맞이했던 곳.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기에 그동안 쌓인 먼지가 가득했다. 풀지 못한 짐을 한곳에 두고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가구를 많이 들여놓지 않은 터라, 더는 쓰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을 밖으로 내놓고 나니 집안이 금세 비워졌다.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고 부러 손걸레를 적셔 오랜 시간을 들여 먼지들을 닦아냈다. 너와 함께 열일곱 살이던 때의 흔적을 지워내려 그다음 며칠도 집을 청소하고 구조를 바꾸는 데에 써버렸다. 너의 흔적을 느끼는 일이 괴로워 그렇게 했지만, 사실 더 괴로운 건 너를 보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따금씩 애초에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해보았지만 너를 만나 겪은 모든 일이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널 만난 것을 후회하는 건 한없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소중한 이가 곁에 없는 내게 남는 건 돈과 시간뿐이었다.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죽이며 너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그마저도 너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방 포기해버렸다. 그렇게 생각을 멈추길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너를 생각했다. 밥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으니 너를 생각하는 일만이 오로지 내가 할 일이었다. 아주 가끔, 너의 생각을 도저히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없는 날은 밖에 나가 거리를 걸었다. 너와 내가 다녔던 학교 건물의 붉은 벽돌은 색이 바랬고, 학교 앞 상가에 걸린 간판들은 거의 다 바뀌어 있었다. 너마저 없는 곳에서 너를 떠올릴 만한 것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음에도 나는 일상의 모든 것에서 너를 찾았다. 이렇게도 네가 내 삶에 남겨놓은 자국은 또렷했다. 너만이 가득한 매일이 반복되고 나니 너의 남은, 짧은 시간쯤은 이제 내가 욕심을 내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결국 너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너를 잃고 수없는 세월을 고통으로 가득 채워 살아갈 줄을 알면서도 네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그동안만이라도 내 눈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병을 얻은 네가 곁을 지키는 이도 없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나서도 쉬이 너를 찾아갈 수 없었다.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할까 자문해보았을 때 자신이 없었다. 나의 욕심은 당장에라도 너를 만나러 가라고 부추겼으나, 나이가 들어버린 네 앞에 여전히 열일곱 살인 내가 나타나 버리는 일이 네게 어떤 느낌으로 와 닿을지 걱정되었다. 나의 욕심과 너의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가 끝내 너를 찾아간 것은 너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너는 침대맡에 기대어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내 얼굴을 확인한 너의 두 눈은 한참이나 크게 뜨여 있었고, 나의 눈 또한 내가 모르는 너의 모습을 담느라 바빴다. ‘박시연.’ 오랜만에 듣는, 너의 목소리가 부르는 나의 이름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네가 불러주는 나의 이름이 이렇게 따뜻했지, 너를 보지 못하는 동안 잊어버렸던 온기를 이제야 비로소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매일을 네 생각에 살았던 나에게 너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너의 겉모습과 상관없이 나에게 너는 언제나 빛나는 때를 살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너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네게 궁금했던, 네게 듣고 싶었던, 또 네게 해주고 싶었던 모든 말들을 뒤로하고 나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의 첫 기억이 언제부터인지, 그때부터 얼마만큼 살아왔는지, 너를 만난 건 언제쯤인지, 너와 이별한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하여 털어놓았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너는 아무려면 좋다고 말했다. 그런 반응마저도 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잠시 말이 없던 너와 나 사이에 너의 말이 내려앉았다. ‘보고 싶었어. 시연아.’ 그 목소리에 나는 온몸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너와의 기억의 한 페이지가 스쳐 지나갔다. 네가 처음 내게 이 말을 건넸을 때 이미 나는 네게 마음을 주어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처음 너의 병실을 찾았을 때와 달리, 날이 갈수록 너의 병색은 점점 짙어졌다. 나날이 말라가는 너를 보며 차라리 내가 그 아픔을 겪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한한 시간을 빌려 고통에 익숙해지는 일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일 중 하나였으므로, 내가 대신 짊어내어 네 고통을 덜어내고 싶었다. 끝이 다가오는 동안, 매시간은 너를 밀어내고 나를 붙잡았다. 너의 병실을 찾는 매 걸음은 너와 함께 할 시간의 단축이었다. 너에게 가는 매 걸음마다 시간을 잡아 늘이고 싶었고, 네게 가는 길을 도망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루어지는 일이 없었다. 하얀 눈이 온 땅을 내려앉은 어느 날 아침, 결국 내가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매분 매 초가 다르게 너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눈을 뜨는 것도 힘겨운 듯 가늘게 눈을 뜨고서도 나를 보고 웃는 네 얼굴을 마주하고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너의 옅어진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예고 없이 끊어질 것 같아서 네 손을 붙들고 너를 살려달라고 되는대로 빌었다. 그리고 나에게 영원히 사는 저주를 내린 누군가가 보고 있다면, 이런 나라도 한 번쯤은 소원을 들어줄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원망했다. 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어 우는 내 손을 꼭 잡아 쥐는 손길에 너를 내려다보니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는 너의 얼굴 또한 눈물로 젖어있었다.
“나 분명 죽는 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너 보니까 살고 싶다.”
“... ...”
“나한테 줬던 네 마음 이제 돌려줄게. 울지 마. 시연아.”
마지막 기력을 쏟은 듯 그 말을 뱉고 너는 말이 없었다. 너의 숨소리 또한 점점 옅어졌고 네가 눈을 깜빡이는 것 또한 잦아들었다. 점점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너를 지켜보는 게 괴로워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너의 이런 순간마저도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조용히 눈을 내려감은 너를 지켜보았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예민한 내 귀에 겨우 들리는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어버렸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의 온기 또한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내 손에 붙잡은 너의 손을 들어 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늘 따뜻했던 너의 온도보다는 서늘했지만, 아직도 나의 체온보다는 따뜻했다. 너의 온기를 붙잡고 싶었다.
“... 제발… 날 두고 가지 마. 날 용서하지 마.”
네가 내 말을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의 다음 행동은 나조차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거의 멈춘 것과도 같은 너의 심장 박동을 듣고 내 행동은 다급해졌다. 내 입술에 닿은 너의 손을 물고 이를 날카롭게 세웠다. 연한 손바닥 살로 이를 박아 넣고, 나의 혀를 물어 피를 내었다. 피가 새어 나오고 있는 곳에 나의 피를 흘려 넣었다. 내가 행하고도, 순식간에 이루어진 행위에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제대로 파악이 되질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운 마음에 내가 상처 낸 너의 손을 붙잡아 이마에 가져다 댄 채 어떤 일이든 일어나길 바랐다. 눈을 질끈 감고 어떠한 소리라도 기다리던 내게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렸다. 너의 심장 소리가 조금씩 규칙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 의식하지 않으면 숨을 쉬는 일조차 잊었던 나에게서, 누군가 일부러 막아두기라도 했던 것처럼 숨이 터져 나왔다. 너의 삶을 붙잡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나의 저주받은 삶으로 너를 끌어내렸다는 죄책감이 뒤섞였다. 그러나 나의 세계는, 아무도 함께 해주지 못했던 나의 시간을 함께할 너를 기꺼이 들이고 있었다.
“… 날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세정아. 제발 살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