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판서네. 벌써 5대째 이조판서를 하고 있는 그 집안은 한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땅이면 땅, 돈이면 돈. 조선의 재물이란 재물은 싹 다 쓸어간듯 하늘높이 솟은 대문은 대갓집의 위용을 숨김없이 자랑했다. 코흘리개 꼬맹이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들까지 그 집 앞을 지나갈때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저런 집에서 한번 살아봐야 하는데 같은 실없는 소리를 덧붙이곤 했다.




 그렇게 유명한 박판서네의 호주 박씨는 누군가 제 재물을 탐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했고, 여기저기 다 헤진 젖먹이가 동냥을 빌러와도 대차게 내쫓곤 했다. 집안 창고에 쌀 팔백석이 쌓여있으나 한 톨 나눈 적이 없는 그의 인덕 또한 한양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집안을 입에 올릴 때마다 부러움과 험담을 동시에 늘어놨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박한지, 평생에 다 쓰지도 못할 재물이거늘! 원래 있는 놈들이 버는 것도 뺏는 것도 더 하다니까. 하지만 그 불평들을 그 앞에서 말하지는 못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박판서는 자신을 폄하하거나 해를 입히는 자에게 배로 돌려주기를 즐겨했기 때문이다. 작은 좀도둑부터 이름 있는 가주까지, 제 심기를 건드린 자들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행동거지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박판서네와 연관되기를 몹시 꺼려했다. 대문 밖에서 구경하는 경우는 있어도, 박씨의 손님이 아닌 이상 그 안으로 들어온 자는 손에 꼽는다는 얘기다.




 "......"




 그래서 시연은 지금 제가 꿈을 꾸나 싶었다. 자시를 넘긴 새벽. 달이 밝아 집 앞마당을 걷던 중에.




 "누구...?"

 "....."




 검은 복면이었다. 새까만 도포로 둘러싼 몸이 제 목소리에 그대로 멈춰섰다. 달빛이 비추지 않았다면 지나쳤을만한 검은 그림자가 덩그러니 내놓은 두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시연 역시 두어번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그 누가 모두 두려워하는 박판서네 집마당을 자유롭게 나돈단 말인가. 낯선 인영은 제 물음에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어지는 정적에 시연의 시선이 방금 그림자가 나온 창고에 머물렀다. 그리고 뒤이어 등 뒤에 이고 있는 쌀가마니로 옮겨졌다. 그대로 입이 벌어지는 찰나, 높은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보다 입이 틀어막히는게 더 빨랐다. 읍, 으읍! 시연은 순식간에 어두운 창고로 끌려 들어갔다.




 "워워, 큰일날뻔...."

 "읍!!"

 "악!!!"




 제 입을 틀어막은 손을 콱 깨물자 복면이 황급히 손을 뺀다. 아파!! 자유를 되찾은 시연은 작게 으르렁댔다.




 "한낱 도둑놈이 이 몸에 손을 대다니,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시연이 씩씩대자 잇자국이 선명한 손을 탈탈 털던 복면이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라? 그러고보니...순간 큼지막한 눈을 불쑥 들이대는 그림자 때문에 시연은 무심코 한발짝 물러섰다. 저를 이리저리 훑어보는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아. 아씨가 박판서네 막내딸?"

 "....."

 "여식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어리네."




 동그란 눈이 이내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박판서의 딸이란 사실을 눈치채놓고도 복면은 더할 나위없이 여유로운 분위기를 흘렸다. 저를 안다면 이 집 주인이 누군지 모를리 없고, 잡히는 순간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알텐데. 평범한 도둑이라면 이 시점에서 시연을 앞에 두고 싹싹 빌거나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나는게 정상이다. 겁대가리를 상실했는지, 아니면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건지. 여전히 복면의 눈은 휘어진채다. 예사롭지 않은 아우라에 시연은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다시 소리를 지르면 또 입이 틀어막히겠지. 경계하는 눈빛으로 거리를 벌리던 시연은 문득 이질적인 느낌에 발을 멈췄다. 그러고보니 이 창고에 발 디딜 곳이 있던가. 분명 빽빽하게 곡식으로 가득 차있을텐데....




 "....맙소사."

 "아 마지막 하나였는데, 딱 거기서 걸려버리네."




 주위를 확인한 시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언제나 산처럼 한가득 쌓여있던 곡식들이 휑하니 사라져있었다. 족히 3000관은 될 무게일텐데. 그 많은 곡식들을 다 훔쳤다고? 시연이 놀란 눈으로 시선을 옮기자, 복면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런 풍경 처음봐서 놀랬나? 하긴 아씨는 태어났을때부터 가득 찬 모습만 봤을테니."

 "......"

 "그러고보니 이상하네, 애기 아씨는 잠들 시간이 아닌가? 어찌 이 시간에 산책이라도?"




 예닐곱 어린아이 취급하듯 능청스런 복면의 목소리에 시연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웃음이 나와? 아버지께서 이걸 발견하면 난리가 나실 텐데. 그럼 너는...."

 "아 뭐 큰일 나겠지. 박판서 성질 더럽잖아."




 ...가만 듣자하니 쌀도둑 주제에 언행도 태도도 무례하기 짝이 없다. 시연이 대답않고 눈을 부라리자 복면은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어올렸다.




 "워워, 그런 눈빛은 무서워 아씨."

 "....."

 "난리가 나긴 하겠지.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만."

 "뭐?"

 "어차피...."




 나는 절대 안 잡히거든. 순간 느껴지는 기백에 시연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더 물러났다. 말투는 능청스럽지만 목소리 속에 분명한 확신이 있다. 시연은 여태껏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도둑을 본 적이 없었다. 말을 마친 복면은 그대로 몸을 틀더니 창고 문을 열었다. 순간 비치는 달빛에 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있잖아 아씨."




 복면이 문을 연채로 시연을 돌아봤다. 새카만 도포가 까만 밤하늘 같다.




 "이거, 만난 기념 선물이야."




 복면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얼핏 붉은기가 돌았다. 선물을 주는 도둑이라니, 이 역시 처음 보는 일. 문득 시연은 복면의 눈이 여전히 웃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너...."




 쌀 팔백석을 하룻밤만에 훔치면서, 주인과 마주쳐도 여유가 넘치고, 범상치 않은 기백과 천진하게 휘는 눈.




 "정체가 뭐야?"




 순간 밤바람에 검은 복면이 흔들렸다. 붉게 휘어진 입꼬리가 시연의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천천히 열리던 입술이, 다시 검은 천에 덮어진다.




 "곧 알게 될거야."




 말을 마친 복면은 그림자처럼 밤속으로 사라졌다. 그 팔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도 잊은채, 멍하니 서있던 시연은 벌레 우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귀신에 홀렸나.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던 것 처럼, 열린 문은 휑하니 삐걱였다. 시연은 복면이 사라진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 몸을 숙였다. 이상한 도둑이 남긴 선물. 달빛에 비쳐 온전히 눈에 담기는 형태가 퍽 고왔다. 시연은 그 이상한 선물을 주워들고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








 매화피는 봄밤에








 "또 붉은 매화여?"

 "그 박판서네까지 털다니, 보통 배짱이 아니네."




 시연의 예상대로 날이 밝자마자 난리가 났다. 그렇게 아끼던 쌀들을 하룻밤 새에 홀랑 도둑맞았으니, 박판서의 심기가 평안할 리 없었다. 구청을 들쑤시며 신고하고 돌아오는 길,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시연은 그제서야 그 이상한 도둑이 요즘 유명한 일지매임을 알았다. 부정이 가득한 탐관오리를 털거나, 부패한 재물을 훔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이라고. 다녀간 자리에는 항상 붉은 매화가지가 남아있어 붙은 이름이란다. 그 어떤 재물이라도 손쉽게 훔쳐내며, 단 한번도 잡힌 적이 없다는데....평민들에게 평판이 좋다는 글까지 읽다가, 시연은 어이가 없어서 제 손에 들린 기별지를 구겨뜨렸다. 결국에는 한낱 도둑놈이란 소리잖아. 의적이니 영웅이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시연은 능글거리던 까만 도포를 떠올렸다. 뻔뻔한 웃음소리까지 떠오르자 기분이 더욱 불쾌해졌다. 잡히기만 하면 아주...행여 한번 더 마주친다면 이번에는 꼭 잡아 감옥에 처넣자. 시연은 혼자 굳게 결심했다.






 -






 "....."

 "...아니."




 그렇다고 당장 또 마주치고 싶단 소린 아니었는데. 여전히 달이 밝은 밤, 시연은 낯설지 않은 검은 복면이 제 집 담벼락에 걸쳐있는 것을 보며 혀를 찼다. 이게 또 무슨 상황이냐. 어이없는 얼굴의 시연을 발견한 복면은 허둥대더니 그대로 무게 중심을 잃고 철퍼덕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작게 앓는 소리가 난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복면이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너 진짜 목숨이 아깝지 않구나?"

 "....."

 "무슨 자신감으로 또 왔어? 이번에는 안 놓칠..."

 "허억. 허..."




 순간 익숙치 않은 숨소리에 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보니 복면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요전에 본 여유로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날랬던 움직임도 둔탁하기 짝이 없다. 시연은 거친 숨소리에 경계하며 조금씩 다가갔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 가려진 도포에서 순간 비릿한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피?"

 "....하으."




 복면은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옆구리만 부여잡았다. 붉은 선혈이 울컥 배어나온다. 시연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복면에게 다가갔다.




 "너 뭐야? 왜 이래?"

 "헉....아으...."

 "어찌 이런...."




 가까이서 본 복면의 상태는 훨씬 심각했다. 무슨 짓을 하고 온건지 멀끔했던 까만 도포는 여기저기 베여 너덜거리고, 계속 손으로 누르고 있는 허리 부근은 온통 피범벅이다. 시연은 금방이라도 멎어버릴듯한 복면의 숨소리에 더럭 겁에 질렸다.




 "...어, 어떡해? 괜찮아?"

 "....."

 "지혈...지혈을 해야 하는거 아니야? 피가....붕대를...."

 "...아,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복면이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눈이 마주친다. 초승달처럼 휘던 눈은 괴로운듯 일그러져 있었다. 시연은 숨을 삼켰다. 일평생 부잣집 막내딸로 금이야 옥이야 자라온 시연은 이런 괴이한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렸지만, 우물쭈물하는 새에 정말 큰일이라도 날까 시연은 황급히 제 저고리를 벗었다.



 

 "헉...아니, 아씨?"

 "...손 좀 치워봐. 빨리!"




 고운 옥빛 저고리에 금세 붉은 빛이 스민다. 단단히 허리께에 눌러 고정하자 복면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엄청 비싼 옷 같은데...시연은 맥없이 중얼대는 복면에게 조용히 하라며 눈을 흘겼다. 지금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옷이 문제니? 작게 으르렁대니 가만 입을 다문다. 가까이서 보니 몸 여기저기에 자잘하게 긁힌 상처가 많다. 몸을 어찌 굴리길래 이런....시연은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복면을 옆 나무그늘에 옮기고, 후다닥 부엌으로 향했다.




 "약, 약, 약......"




 마실 물과 물에 적신 수건, 집에서 쓰는 약들을 들고 돌아오자 복면은 놀란 눈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아씨, 뭐하려고? 입 좀 다물고 있어. 시연이 조심스럽게 긁힌 상처를 수건으로 닦아내니 작게 신음소리가 났다. 아야, 아파 아씨. 인상을 구기길래 좀 참으라고 을러대니 또 얌전해진다. 시연은 상처 위의 더러운 흙들을 닦아내고 가져온 약을 펴발랐다. 꽤 아픈지 악 소리를 내며 잔뜩 몸을 비틀다가, 이내 잠잠해진 동그란 두 눈이 시연을 빤히 바라봤다. 느껴지는 시선에 뭘 보냐고 퉁명스레 말하니, 바람빠지게 웃는 소리가 난다.




 "...지난번엔 완전 까칠하시더니, 오늘은 상냥하시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다 뒤져가는 몸뚱이도 농할 여유는 있나봐."




 아야. 찰싹 어깨를 한대 맞은 복면이 울상을 지었다. 아깐 말 한마디 못하고 숨쉬는데 급급하더니,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나. 




 "...아씨."

 "또 뭐."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고개를 들자 눈이 가깝게 마주쳤다. 제 숨이 닿는 거리, 옅은 갈색 눈동자에 시연은 무심코 숨을 삼켰다.




 "....고우시네."




 이어진 말과 함께 복면의 두 눈이 다시 둥글게 휜다. 순간 가슴께가 쿵하고 내려 앉았다. 뭐?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더니 어여쁘시다고요, 아씨.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시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피는 철철 흘리면서 여전히 입만 살았구나. 물에 넣으면 주둥이만 동동 뜨겠다. 매몰찬 말투로 타박해도 여전히 웃는 낯이다. 




 "나는 예쁜걸 좋아해서."




 태연한 목소리에 순간 시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예쁘다는 말은 숱하게 들어왔을텐데, 아까부터 쿵쿵 울려대는 가슴께가 퍽 이상하다. 뻔뻔한 건 처음 만났을때부터 알았지만 참으로 서슴없구나, 제발 그 주둥이 좀 다물래? 시연이 툴툴대자 복면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참 가볍다. 날래 날아갈 것 같이.






 모두 잠든 밤. 대충 상처를 싸맨 복면이 몸을 일으켰다. 걸을 수 있어? 시연이 물어보니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빨리 가."

 "......."

 "빨리 가라고."

 "아깐 안 놓친다고 하지 않았나?"




 어찌보면 당연한 물음에 시연이 입을 다물었다. 제 집 창고를 순식간에 다 털어간 도둑. 단 한번도 잡힌 적이 없는 도둑. 하지만 지금이라면 금방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몸이 성하지 않은 도둑. 그런 도둑을 염려한 제 행동들이 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




 여전히 복면의 허리춤엔 익숙한 저고리가 말려있다. 본래 고운 옥색은 온데간데 없고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지만...잠시 그 부근을 보던 시연은 대답을 기다리는 두 눈 대신 땅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몰라. 내가 지금 뭘하는건지."

 "......"

 "가다가....죽지나 말아."




 퉁명스런 말투였으나 시연은 고개를 들지 않아도 복면이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왠지 귀끝이 뜨겁다. 시연은 괜히 인상을 썼다.




 "너 오늘 나한테 빚졌어."

 "어?"

 "....다 나으면 갚으러 와."




 굳이 필요없는 말까지 술술 나온다. 시연은 멋대로 움직이는 제 입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홱 돌아섰다. 이제 가던지 말던지. 시연은 울렁대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자꾸만, 자꾸만...




 "아씨."




 여기가 이상하다. 나직한 목소리에 시연이 감은 눈을 떴다.




 "내 이름, 세상 세에 바를 정. 김세정이야."

 "......"

 "이름 그대로 세상을 바르게 할 의적, 은혜 입은 건 절대 안 잊어."




 또 올게, 고마웠어. 쿵. 쿵. 차분한 세정의 목소리와는 반대로 자꾸 제 속에서 울려대는 소리가 유난이다. 처음 듣는 진지한 말투에 시연의 박동이 빨라졌다. 세정. 김세정. 두어번 곱씹고 뒤를 돌아보니,




 "...어."




 움직이는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어느새 휑하니 비어있는 자리에 시연이 눈을 깜박였다. 세상 날랜 도둑 아니랄까봐, 그 너덜대던 몸으로 참 놀랍게도 사라진다.




 "....."




 빨리 가라고 한 건 저인데...그새 사라진 인영에 왠지 마음이 섭섭하다. 시연은 세정이 기대 앉아있던 나무에 남은 붉은 자국을 손으로 쓸었다.




 '은혜 입은 건 절대 안 잊어.'




 처음 들어본 낮은 목소리가 계속 웅웅 울린다. 시연은 작은 주먹을 그 위로 말아쥐었다.




 거짓말이면, 가만 안둬.






 -






 [도둑 일지매, 어젯밤 손가네 금괴를 훔쳐 달아나....장정 일곱이 뒤쫓았으나 끝내 잡지 못해.]




 시연은 조보를 느릿하게 훑었다. 읽어내려간 글자들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일지매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하룻밤만에 곡식 팔백석을 훔쳐낸 불가사의한 도둑은, 지치지도 않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며 한양 전체를 뒤집어놓는 중이었다.




 "체력도 좋다...."




 문득 제 집 담벼락 밑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듯 헉헉대던 세정이 떠올랐다. 몸은 이제 괜찮나. 그날 밤으로부터 벌써 보름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제 뒤에서 홀연히 사라진 일지매는 사흘정도 잠잠하더니, 이내 다시 나타나 집집마다 매화가지를 수놓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는 도둑. 평민들의 영웅. 이 시대의 새로운 의적. 여전히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세정에 비해 시연은 제 자신이 조금 작게 느껴졌다.




 구색만 좋은 한낱 좀도둑인줄 알았는데. 일지매는 정말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줬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그간 세정의 행적들은 꽤 빛을 냈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노인에게 재물을 나눠주고, 부모가 없는 어린 아이들에겐 새옷과 신을 안겨주며, 과한 세금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에겐 쌀을 나누었다는 등. 주로 가난하고 생계를 잇기 어려운 자들의 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시연은 문득 천진히 휘어지던 두 눈을 떠올렸다. 한없이 가벼워보였는데, 좀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




 뭐 그래, 정의롭고 인정있고 어쩌고 저쩌고는 그렇다치고. 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보던 조보를 접었다. 왜 우리 집엔 코빼기도 안비쳐? 은혜 갚으러 온다며. 누구는 지 때문에 하루 온종일 혼났는데. 시연은 일지매가 떠난 다음날 아침을 떠올리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문제는 세정의 상처에 묶어준 저고리였다. 하룻밤새 감쪽같이 사라진 고운 저고리의 부재를 능숙하게 둘러댈만큼 시연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게 얼마짜리 옷인데! 잃어버렸단 말만 겨우겨우 반복하던 시연에게 박판서는 노성을 냈다. 하긴 제 나이가 몇인데, 밑도 끝도 없이 잃어버렸다를 주장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가고 더럭 다친 도둑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그 날 시연은 하루종일 혼이 나고서야 사랑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일지매가 어느 집을 털었다느니, 매화 가지가 또 놓여있었다느니. 그와 관련된 소문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얄궂게도 저희 집에는 머리카락 하나 비추지 않았다. 혹시나 왔는데 못알아챌까 싶어 밤마다 세정을 마주쳤던 마당 앞에 나가보기도 하고. 담벼락 근처를 서성이기도 했는데....시연의 이런 행동들이 무색하게도 검은 복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은혜 절대 안 잊는다더니."




 짜증나 죽겠네. 그렇게 진지한 말투로 말하지나 말던가. 시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고작 도둑 하나에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지 알 수가 없다. 괘씸한건 둘째치고 섭섭하기까지 하니....




 "왜 안오는데."




 무심코 뱉은 중얼거림이 바람에 흩어졌다. 이상한 도둑에게 헛바람이 옮았나보다. 하필 다 너덜거리는 모습으로 헤어져서 그래. 좀만 멀쩡했어도 이렇게 신경 안쓰일텐데. 억지로 이유를 붙여봐도 영 마음이 갑갑하다. 시연은 품속에서 매화 가지를 꺼냈다.




 "....."



 처음 만났을때 받은 선물 아닌 선물. 조금 시들해진 붉은빛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이상했다. 입만 살았던 뻔뻔한 도둑놈이 뭐가 예쁘다고. 




 "진짜 이상해."




 그 휘어지는 눈이 보고싶었다. 






 -





 "네?"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아버님. 그게 무슨...."

 "일주일 뒤다."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였다. 시연은 그대로 굳어 박판서를 바라봤다. 제가, 혼례요? 황대감이랑? 제 귀를 의심했으나 나오는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아주 훌륭한 분이시니 네 복인줄 알고. 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도 슬슬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싫습니다."

 "박시연."

 "죽어도, 싫습니다."

 "말을 조심해라 시연아. 이미 결정된 일이다."

 "결정이요? 결정이라고 하셨나요? 누구의?"

 "....네가 태어났을때부터. 너를 사랑하신 분이다."




 사랑? 역겨움에 속이 뒤틀렸다. 황대감. 제가 예닐곱일때부터 수시로 저를 만지고, 음흉한 눈으로 바라보던 늙은이. 시연은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헛구역질을 참았다. 아버지의 오래된 친우라며 집에 찾아 올 때마다 시연은 그를 피해 나가거나, 방에 틀어박히기 급급했다. 낯짝마저 두껍고 돼지 같은 자. 그런데 혼례라고, 그 늙은이랑 내가?




 "네가 아주 어릴적부터 약조했다."

 "....."

 "지금은 받아들이기 힘들어도...나중엔 알게 될 거다. 좋은 분이라는걸."

 "저를 파셨나요?"

 "뭐?"

 "그가 무엇을 준다고 하였길래."

 "박시연."

 "가진건 돈뿐인 늙은이가 무엇을 준다고 하였길래. 하나뿐인 딸을 파셨나요."




 짝. 날카로운 마찰음이 방안에 울렸다. 시연은 부어오르는 뺨을 붙잡으며 박판서를 노려봤다. 계집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버릇없게...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느냐? 위압적인 목소리에도 시연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다 너를 위해서다."

 "....."

 "너를 위해서란 말이다."




 혹시라도 허튼 생각하지 말고. 혼례날까지...얌전히 지내라. 말을 끝낸 박판서는 고개를 돌렸다. 마음속에서 툭하고 무언가가 끊긴다.




 "아버님."

 "....."

 "너무하십니다."

 "......"

 "정말로...."




 너무하십니다. 아버님. 목소리가 떨렸다. 끝내 시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펑펑 울었으나 박판서는 시연에게 다시 시선을 두지 않았다.





 -






 황대감과 박시연의 혼례소식은 금방 퍼져나갔다. 혼례를 아주 크게 올린다던데, 부잣집과 부잣집의 만남이니 난리가 나겠어. 박판서네 막내딸이 그렇게 어리고 예쁘다며? 황대감 경사났네. 남녀노소 누구 할 것 없이 떠들어대는 소문은 끝도 없이 퍼져나가 기별지에 기사까지 실렸다. 




 "....."




 시연은 하루하루 말라갔다. 말간 얼굴은 금세 빛을 잃었고. 성치 않은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아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도망을 치자니 아버지의 성격상 금방 잡힐게 분명했고, 확 죽어버리자니 그건 또 더럭 겁이 났다. 겁이 많은 자신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싫은데, 너무 너무 싫은데....멍청하게 웃는 황대감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시연은 매일밤 울었다. 목이 쉬고,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어도.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




 새까만 밤,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시연은 잠들지 못했다. 벌써 내일이었다. 내일이면 그 끔찍한 혼례를 올린다. 시연은 이불속에서 계속 뒤척이다 몸을 일으켰다. 비척비척 마당으로 나오니 푸른 달빛이 시연을 비췄다. 느릿느릿 아무도 없는 마당을 걷다가, 무기력해진 시연은 그늘진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자꾸만 앞이 흐려진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죽어버릴까? 아니면 도망이라도 쳐볼까. 의미없는 생각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시연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읏차."




 그 때였다.




 "어라, 여기 있었네!"




 가벼운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건. 쿵. 쿵. 쿵. 순간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려는 찰나, 펄럭하고 제 어깨에 무언가 걸쳐졌다.




 "방에 없어서 어디 있나 했네. 한참 찾았잖아."

 "......"

 "아씨, 잘 지냈어?"




 멀끔한 옥빛 저고리가 시야에 가득 찬다. 고개를 드니 동그란 두 눈이 또 휘어져있다. 그토록 보고싶던 그 눈이 다정하게 저를 향한다. 시연은 아무말도 못한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 울 기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뿌얘지는 시야에 목소리가 떨렸다.




 ".....너..."

 "어?"

 "왜 이제 왔어. 왜!"




 마음속 불안함이 와르르 쏟아지는 기분. 목소리만 들어도 왜 이렇게 안심되고 눈물이 나는지. 시연은 엉엉 울며 복면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했는지 세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어, 울어? 왜 울어? 허둥대며 도닥이는 손길이 서툴다.




 "이 나쁜새끼야. 은혜 갚는다며. 은혜 안 잊는다며! 다시 오라고 했는데 왜 안와. 왜. 왜...."




 근데 그마저도 다정해서 눈물이 났다. 시연은 복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나쁜새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진짜...진짜 너....참아왔던 서러움까지 와르르 쏟아내는 시연을 세정이 살살 달랬다.




 "아이고 아씨, 미안. 내가 일단 다 미안해. 그니까 그만 울어. 응?"

 "........"




 서툴게 도닥이는 손길에 겨우 진정한 시연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좀 괜찮아? 물어오는 말에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시연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세정이 한숨을 쉬었다.




 "어우 깜짝 놀랐네...."

 "....."

 "아 맞아. 나 그거 들었는데."

 "...뭐?"

 "아씨 혼례 올린다며?"




 황대감인가 뭔가 하는 할배랑...악! 검은 도포에 다시 한번 작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야 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진짜 나쁜새끼 아냐 이거?! 주먹질과 함께 시연의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엉엉 우는 시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세정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와, 웃어?




 "아 잠깐, 아.아씨 왜 이렇게 잘 울어?"

 "넌 왜 웃어? 내가 늙은이랑 혼례 올리는게 웃겨?"

 "아니 아씨 우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아까 울 땐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번에는 큭큭 웃고 자빠졌다. 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이 도둑놈은 또 장난질이네. 몰아치는 서러움에 씩씩대고 있으니, 한참 웃던 세정이 제 복면을 술술 풀었다. 어, 잠깐...갑작스런 행동에 눈만 껌뻑이는데, 복면을 다 풀어낸 세정이 고개를 들어 시연을 바라봤다.




 "....내가 은혜 갚는다고 했잖아."

 "어?"




 처음 보는 맨 얼굴. 갑자기 똑바로 마주치는 시선에 시연의 몸이 굳었다. 장난스럽지만 올곧고 다정한 눈빛. 세정은 품안에서 매화가지를 꺼내더니 시연의 귀에 조심스럽게 꽂았다.




 "오늘 일지매는 박판서네 막내딸을 훔칠 예정인데..."

 "....."

 "어떻게 생각해?"




 세정이 씩 웃는다. 올라가는 입꼬리가 자신감에 가득 차있었다. 시연은 얼이 빠져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방금 지나간 말을 느리게 곱씹었다.




 "....뭐?"


 


 너무 놀라 딸국질까지 나온다. 갑자기 히끅대는 시연을 보며 세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훔쳐줄게 아씨. 그럼 혼례 안해도 되잖아."

 "......."

 "...사실은 말야."




 나 다쳤던 날. 내 옆에서 계속 챙겨주던 아씨 얼굴이 계속 생각났어. 처음 듣는 조곤조곤한 말투에 시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입은 험했는데, 그러면서도 끝까지 내 상처 닦아주던 그 옆 얼굴이."

 "....."

 "눈이 이랬지. 코는 이랬고. 입술이 참 예뻤는데...하면서. 그림도 그려보고."

 "......"

 "근데 마음이 이상하더라고. 처음엔 그냥 예쁘다고만 생각했는데, 자꾸 불쑥불쑥 떠오르니까....설마 내가 그 아씨를 좋아하나? 생각도 들고."




 세정이 머쓱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귀끝이 자꾸 뜨거워진다. 시연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꾹꾹 눌렀다.




 "이래저래 좀 혼란스러워서 선뜻 다시 못왔어. 근데....얼마전에 아씨가 뭔 할배랑 혼례 올린단 소식을 들으니까, 마음에 확 불이 나더라고? 당장에 그 대감인가 뭔가 흠씬 패주고 싶었지."




 쿵쿵 뛰어대는 소리가, 행여 들릴까봐.




 "그래서 알았어. 나 아씨 좋아하는구나."

 "......"

 "그러니까, 아씨만 괜찮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이 세정의 손을 잡았다. 꽉 붙잡은 손에 세정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씨? 시연의 몸이 잘게 떨렸다. 첫 번째 만남도, 두 번째 마주쳤을 때도 꿈같았는데. 이번에도 꿈같구나 너는. 자꾸 현실을 잊게 만들어. 그렇게 괴로웠는데, 지금 곁에 있는 것만으로 안심되는 것처럼. 시연은 이제 다른 의미로 조금 울고 싶었다.




 "...이거 긍정의 의미로 봐도 되는건가?"

 "...마음대로 해."




 세정이 제 손을 맞잡더니 손등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췄다. 정말 시대를 타고난 도둑임이 틀림없었다. 눈 깜짝할새 제 마음까지 훔쳐냈으니. 시연은 그대로 세정을 끌어안았다. 두 개의 그림자가 포개진다. 꿈이라도 좋을, 매화피는 봄밤이었다.